
프리
< 끝. >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일이 잘 안 풀렸다.
미리 맞춰 둔 알람시계가 작동을 안 해
예정보다 30분 늦게 일어나고,
급하게 집을 나서느라 수험표를 깜박할 뻔했다.
수험표 챙겨가라며 제 부모님께서 서둘러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아예 두고 올 뻔했다.
겨우 올라탄 버스는 만원이라 수시로
발을 밟히기 마련이었고, 갈아탄 지하철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사실 이건 평소와 똑같았다).
겨우겨우 도착한 시험장 앞은 수험생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로 북적였다.
거기다가 수고하라며 나눠주는 온갖 사탕과
초콜릿들, 그리고 재수학원 팸플릿-설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홍보지를 쫙 찢어 버렸다-까지.
할로윈의 에*랜드가 차라리 사람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설영은 출근하신 부모님 대신 함께 와 준 제 형들과,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응원하겠다며 찾아온
선배 자하의 응원을 받으며 수험장에 들어섰다.
소위 말하는 ‘수능 한파’라는 놈이 찾아온 것인지,
오늘은 평소보다 유독 추웠다.
설영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게다가 아침의 고난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리 운도 최악이었다.
의자는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었고,
책상은 덜컹거려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창가라 그런지 밖의 찬바람이 그대로 불어
들어왔다. 적어도 졸지는 않겠네,
설영은 생각했다. 그 와중에, 수능샤프도
덜컥거리는 소리만 내고 샤프심을 안에서
수시로 부러뜨리는 통에 감독관을 불러
교체해달라고 해야만 했다.
불안하긴 한데, 일단 액땜으로 생각하자.
설영은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곧, 종이 치고, 수능이 시작되었다.
1교시 국어는 나름 괜찮았다.
문법 부분이나 문학 부문에서 평소 이상하게
관심이 가던 향가나 신라 관련 작품들이
많이 나와 비교적 수월하게 풀 수 있었지만,
비문학에서 처음 보는 경제학 이론과
물리학 이론이 나와 애를 먹었다.
2교시 수학은, 글쎄, 잘 모르겠다.
애초에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적도 없었던
29번과 30번은 당연히 찍었고, 21번은
나름 푼다고는 풀었지만 정답일지는 자신이 없었다.
효월이 형이 많이 도와줬는데,
결국 완벽히는 못 풀었네.
설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에는 형들과 어머니,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하가 함께 싸 준
도시락을 먹었다. 보온 도시락이긴 해도
날씨가 적당히 추운 게 아니라 그런지,
상당히 식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과 선배의 정성과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였을까? 찬 공기에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다시 온기가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설영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도시락을 비웠다.
맛있던 도시락 덕분일까?
왠지 남은 시험은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교시부터는 문제들이 기다렸다는 듯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영어는 평소에 비해,
전체적으로 잘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칸 추론 문제가 조금 애매했지만 뭐 어떤가.
애초에 영어는 절대평가니까 90점을
넘기기만 하면 일단은 안심이다.
이어진 5교시에는 한국사를 응시했는데,
한국사야 원체 설영이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여유롭게 한국사 문제를 풀고,
곧바로 동아시아사와 사회/문화 시험을 쳤다.
동아시아사도 한국사와 마찬가지로 꽤
자신 있는 과목이었고, 사회 문화도 한두 문제가
헷갈린 점을 제외하면 별문제는 없었다.
이제 설영은 마지막 6교시,
제2외국어/한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원래는 볼 생각이 없었지만, 제 형들이
다니고 있는 대학에 가려면 제2외국어
응시가 필수였다. 다행히 설영은 어릴 적부터
한문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기에 과목을
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설영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 학생들로 인해 듬성듬성 빈 자리
사이에 앉아, 마지막까지 시험을 치르고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수능이 끝났다.
터벅터벅, 학교를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와 돌아보면, 사실 설영의 고3이 그리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옆 학교의 학생회장이
동네에서 일어난 악질적인 사건들의 범인으로
설영을 지목하기도 했고, 그 때문에 학생회에서
잘리기도 했었다. 예전에 쌓인 오해들 때문에
동급생들과도 이런저런 마찰을 겪었었고,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답시고 졸업한 선배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몇 번이고 죽을 뻔도
했었다(결국 오해는 풀었다).
그때는 형들과 부모님께 많이 혼났지,
설영이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몇몇 과목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런 일들을 겪고 본 수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꽤 괜찮게 본 것 같기도 했다.
설영은 수험장을 나서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서서히 깔리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수능이 끝나니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지만,
뭔가 허무한 것도 같았다.
어쨌든 수능이란 고3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 아닌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뛰어난 형들과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자신이 고등학생이 되고,
형들과 주변 선배들이 다 같은 대학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고는 저도 반드시 함께하겠다는 다짐을
굳혔었다. 그렇게 수년 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오늘,
단 하루, 단 몇 시간 만에 전부 끝났다는 점이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장 내일도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수능특강과 수능완성을 펼쳐봐야 할 것만 같았다.
설영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선연히 타오르던 노을이 어느덧 밤하늘을 마주하곤
아스라이 흩어지고 있었다. 곧, 설영의 눈에 운동장
너머 저만치에 서 있는 제 형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미적미적 발을 옮기는 저를
발견하곤 어서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설영은 그들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했고,
종래에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설영아!"
백언과 송옥, 효월이 그를 반겼다.
설영은 그들에게 다가가 안겼다.
세 사람도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수능 끝난 걸 축하한다."
"오늘부터 당분간은 푹 쉬어."
"네 부모님께서 음식점을
예약해두셨다고 하니까, 같이 가자."
세 사람의 말에, 설영은 밝게 웃었다.
그래, 지금 제 느낌이 허무하든,
홀가분하든, 어쨌든 수능은 끝났다.
아직 면접이나 발표 등, 남은 일정이 많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수능이 끝났는데.
세 사람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설영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효월 형 말대로 당분간은
놀아야지. 설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환한 웃음이 서서히 얼굴 위로 번졌다.
형들과 놀이공원에 가고, 자하 선배와는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를 봐야지.
서검 선배나 화운, 무원 선배와 함께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모님과 외식을 하고,
스승님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
설영은 속으로 찬찬히 계획을 세웠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자 옆을 지나치는
같은 반 학생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설영은 손을 들어 인사하곤 웃으며 말했다.
"수능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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