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려
< 화운(和韻) >
한파 따위 느껴지지 않는 뜨거운 함성과 태양도
아직 제대로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고양감이 일대를 지배한다. 분명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지만 짧은 생을 통틀어서
가장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고향을 찾아온 것 같아
제 피부를 간질이는 고양감을 가볍게 즐긴다.
물론 다른 사람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소란스러움에 위축되는 경우도 있고
도리어 고양감에 휩싸여 긴장을
풀어버리고 마는 사람도 있다.
약간의 언짢음과 값싼 동정을 담아 혀를 차고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문턱을 넘었다.
장내로 들어서게 되면 바깥의 흥분은 없고
적막만이 들이찬다. 가장 치열한 공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떠한 구호도 응원도 외침도 필요 없는 공간,
각자의 싸움을 진행할 뿐이다.
남들이 막판 암기를 하고 있거나 허기를
달래고 있는 사이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쳐다본다. 잠깐 눈을 붙일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리 한 마리가
양 다섯 마리를 먹었으니 이제,
"왔어?"
책상 앞에 서 신사처럼 내게 내미는 손을 무시하며
그의 어깨를 잡고 돌려 등을 떠밀었다.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계속 그의 등에
힘을 주는 동안 입꼬리를 내리는 연습을 했다.
"결국 보러 왔네, 시험. 어차피 육군사관학교에
우선 선발 됐으면서 뭘 또 수능까지 봐."
"보고 싶었으니까. 다른 이유가 필요 있나?"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내가 언제 시험이 보고 싶다 했어,
널 보고 싶다고 한 거지."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다 계단 난간에
기대었다. 이 고고한 자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은 질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목윤을 만났던
2년 전까지 어떻게 살았던 건가 싶을 정도로
이제 목윤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단 1초도 아까웠다.
서로 다른 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 대한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몇백년 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갈증에 잠겨 있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길을
걸으면 이 갈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바로 그만두었다. 둘이 걷는 길이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상담심리학을 전공할 거면
군에 상담사로 와도 되지 않나?"
작게 웃으며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던 그의 눈동자 속에서
고민을 눈치채고 빠르게 덧붙였다.
"장난이었어, 네가 연구를 하고
싶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니."
표정으로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난 직후
예비종이 울리자 서둘러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3교시는 뭐였더라…… 영어네. 그저 기호로
만날 때는 거부감이 적었지만 언어로 나오는 것은
질색이었다. 하물며 시험인데. 차라리 아까 자려고
했던 잠이나 마저 자는 게 좋아 보였다.
목윤과 같이 두르고 온 붉은색 목도리를 베개 삼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
-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다양한 풀벌레
소리가 인상적인 학교였다. 다시 말하자면,
언급할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 많은 학생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방 한구석에 위치한
사립이기만 한 고등학교에 특별함을 기대하면
그게 더 문제일 수도 있었다.
아,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는데,
이 학교의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존재였다.
유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백발의
정계 고위층 자제는 관심을 불러모으기에
차고 넘쳤다.
화려한 악명을 떨쳤던 서울의 중학교
시절에는 기분 나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시비를 걸어오던 이들이 쇄도했기에
아는 사람이 없고 (어른들의 기준에서) 소문이
퍼지지 않는 지방의 학교에 재학하게 되었지만
학교생활이 더 편해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 욱해서 누군가를 향해 주먹질을 해도 비교적
쉽게 무마 되는 정도?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배워서 안다. 생명을 해칠 만큼 정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도
살생은 그르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실낱만큼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는데 왜?'
라는 질문을 해온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았고
효율적이었던 방법을 택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2학기도 몇 달이 지난
가을 날, 학생 한 명이 전학을 왔다.
여느 학생과 같이 무채색의 하복을 입고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첫인상은
'붉었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창밖에 넘쳐나던 단풍나무 잎들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목윤의 사복 차림에 붉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갔다.
목윤은 요양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온 것답게
체육 수업은 물론이고 항상 책상에 가만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고 또래들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에 곧 나와 같은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와 나의 공통점은 그게 다였다.
"정말이지 반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어.
매일 납량 체험을 하는 것 같다니까?"
"쉿, 목소리 낮춰. 미치광이 귀신이 지나가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거 아냐?
잘못하다 교무실까지 들릴라."
그날도 어김없이 일부러 들으라고 시비를 거는
무리를 마주쳤고, 발로 넘어트린 다음 밟고 있었다.
달랐던 점은 한 마디 으르렁거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지나가던 목윤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그 후로 온종일 마음이 찝찝했다.
왜?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사이이고 나에 대한
소문도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들어봤을 텐데.
결국 참지 못하고 종례를 마치자마자
목윤을 불러세웠다.
"아까 나 마주쳤잖아, 그치?"
"점심 때의 일을 말하는 거라면, 맞지."
"마음에 안 들었지, 내 행동?"
"누구나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알면서 왜……."
"왜 질책하지 않았어? 왜 고치라고 하지 않았어?
왜 그저 두고 보고만 있었어?"
목윤이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럴 만 했다. 선생들 마저 포기한 와중에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한테 왜 말리지 않았냐고
다짜고짜 묻는 것은 그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유전도 돌연변이도 아닌 백발도 있는
마당에 운명이 없고 인연이 없을까.
4년 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처럼
나는 그저 영혼이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이리는 이리이기에 사랑하는 것이니까."
말을 뱉은 다음 목윤은 잠시 경직되었다.
의도치 않게 나온 말인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그는 속삭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리한테 양이 되라고 하는 것은 강제이고
폭력이니까. 모두 세상의 톱니바퀴처럼 의미가
있는데 내가 그걸 섣불리 바꾸거나 갈아 끼우려
하면 망가져 버릴까 봐.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니까."
궤변이다.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바뀌어나가는 것이 세상인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이 굳이 그런
비유를 들었다. 이 달관하는 태도는 뭐지?
이 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의 어폐를 알고서도
마지막 남은 동아줄 마냥 매달리고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영혼을 가진 주제에
숙이지 않았다. 그른 것을 붙잡고 고고한 척하고
있는 붉은 풍금조 한 마리였다.
툭, 치면 바스러질 것 같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알 테고. 그런데 궁금한 게 생겼어,"
그의 턱을 잡아 이쪽으로 가까이했다.
허락은 구한 적이 없었기에 나름의 배려로
표정을 살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흥미를 잃고 하던 말을 이었지만.
"너는 이리를 사랑해?"
좋아.
손을 타고 전해지는 이 떨림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이리들을 사랑했어?
사랑할 수 있었느냐고. 앞으로 만날 이리들을
사랑할 수 있겠어?"
아차.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고 정신을
차리고는 손톱으로 그의 볼을 살짝 눌렀다.
"나를 사랑해봐."
"뭐?"
저 고고한 이의 눈동자에 깃든 당황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내게 영향을 주는 것을 허락할게.
나를 바꿔, 하나의 내기라고 생각해.
네게 손해 볼 것 없는 내기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의 승리이고,
그러지 못 한다면 깔끔하게 물러날게."
"그럴 수는 없어."
언제 당황을 품었는지 건조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감정이 상해 가슴팍을
밀쳐버렸다. 예상했다는 듯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 입술을 짓이겼다. 생전 들이지 않았던
정성을 담았는데 거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이 내기라는 거잖아! 내가 동의했으면
된 거 아냐?"
"네 선택이 네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어?"
"그런 너는,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에
목윤은 입을 열다 다시 다물었다.
그 공백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일지
몰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거야.
도망치는 것 밖에 되지 않아.
이리한테 신념이 꺾이는 거라고.
너는 그들처럼, 나처럼 살 수 있어?"
"아니."
"그럼 방관하지 마."
마른 지푸라기에 숨이 불어 넣어졌다.
목윤은 여전히 비리비리했지만 영혼은 이제야
껍질을 벗은 듯 이채가 돌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목윤은 내게 한 마디씩 툭툭 던지고
지나갔으며 대부분은 잔소리에 약간의 안부
인사였다. 나를 바꿔보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철저하게 잔소리만 해댈 줄은 몰랐는데.
괘씸해 도리어 내 쪽에서 질리도록 목윤을 찾았다.
이게 뭔지 아냐고 물으러 가기도,
급식을 같이 먹기 위해,
이동수업에 같이 가기 위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구경하기 위해,
체육 시간에 혼자 앉아있는 그를 약 올리기 위해서.
체육의 체 자도 연관이 없어 보였던 것과 다르게
목윤은 체육 시간 내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어디가 비는지,
힘이 덜 실리는지.
방과 후에 목윤은 벤치에 앉아
내 동작을 봐주기도 했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나를 따라나서 욱하는 내 성질에 시도 때도 없이
참견했고, 나는 그의 운동 부족에 핀잔을 주며
둘이서 볼 것 없는 동네를 억지로 돌아다녔다.
목윤과 함께해야 그제야 온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봄에 그와 함께 길을 거닐면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고 여름에는 그가 부채를 부쳐줘야지만
비로소 시원함을 느꼈다. 가을에는 내가 그의 색에,
겨울에는 그가 내 색에 파묻힌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첫 만남 이후 계절이 두 번 돌아오자 진로를
정하게 되는 시기가 왔고 목윤은 상담 심리학자가
되기 위하여 심리학과로, 나는 군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그곳이 아니면 허락할 수 없다던 집안에 의해
육군사관학교에 지망하게 되었다. 관찰과 분석이
뛰어났던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면서 실수하지
않도록 사람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나는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이 그것 뿐 이어서,
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 막연한 이끌림이 있었다.
-
어린 시절의 나는 건강하지 않았다.
적어도 집안 어른이란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말도 세 살이 되어서야 뗐고 아무런 표정도
의사도 내비치지 않았다. 거기에다 노인과 같은
백발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4년 전 달이 보이지 않았던 날 눈을 떴다.
짙은 구름이 하늘의 눈을 가렸을 때 내 껍데기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공해 때문에 밤 도시의 불빛만 보이던 그때 세상이
광채로 휩싸였다. 그저 밝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림자 없이 구석 없이 온 세상을 뒤덮은 빛에
눈이 부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자
저 멀리 발원지로 짐작되는 형체가 보였다.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그것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깨닫자마자 광채가 사그라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대신 작은 초승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 그 영롱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방 한 구석에 있던
거울을 보았다. 화려한 금구슬 장식에 비단옷을
입은 흑발의 자신이 서 있었다.
놀라 눈을 깜빡이자 지금과 같은 백발을 한 채
백의를 두른 자신이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거울상은 입을 열어 뭐라 말했지만
소리로 전해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떠보니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무도 간밤의 일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되었다.
-
하늘은 내 편인 줄 알았다.
설령 내 편이 아니더라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닌가,
사실 내가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서,
연약한 영혼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외면하고 싶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한탄해도 일어난 일은
돌이켜지지 않는다.
모두 돌아가 텅 빈 장례식장에 앉아
술을 들이킨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 그와의 식장이,
식이 아니다.
목윤과의 관계는 서류상에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으나 그의 가족을 대신해 상을 치렀다.
이름도 없는 산 깊숙이 위치한 묘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술잔을 올렸다.
붉고 붉은 그대 옷깃,
아련하고 아련한 내 마음
내가 비록 가지 못하나
그대는 어찌 소식 전하지 않는가?
붉고 붉은 그대 패옥 끈,
아련하고 아련한 내 생각
내가 비록 다녀오지 못하나
그대는 어찌 찾아오지도 않는가?
안절부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나는 또다시 혼자 남아 있다지만
한 치 떨어져 있다 해도
천 리 떨어져 있는 듯하네.
그의 흐느낌에 꽃들이 붉게 물들었고,
그의 울부짖음에 모두 땅에 떨어졌다.
그의 두 눈이 핏빛으로 잠식되며 검붉은
눈물이 흐르자 땅을 뒤덮은 꽃잎들은
대지를 물들였고, 비탄에 빠져 말하는 법을
잊은 그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을 때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언어를 대신해줬다.
제사장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의식을 지내니,
하늘은 붉은 연꽃 두 송이를 은하수에
흘려보냄으로써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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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和韻)
: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답시를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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