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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딩

< 봉임한동 封箖寒冬 >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겨울날, 

설영과 자하는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난도 치고, 티격태격 다투며

서로를 향해 열을 올리느라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어디 가는 건데?"

 

"꼭 아셔야 합니까?"

 

설영의 냉랭한 대꾸에 자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상선이 휘하 화랑의 행적을

궁금해하는 게 뭐가 잘못됐나?"

"멋대로 따라온거면서 그것까지 아셔야겠습니까."

"응."

 

 

한쪽은 틱틱거리고 또 다른 한쪽은 재밌다며 웃는

둘은 누가 보아도 화랑도의 상선과 백의화랑이라

볼 수 없었다. 보통 백의화랑과 상선의 관계라 하면

감히 이런 말대꾸는 할 수도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것이 뒤틀린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설영랑, 얼굴 펴."

"제발 좀 필 수 있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건 스스로 해야지. 누구한테 뭘 바래?"

"제 옆에 계신 누군가가 아니면 얼굴 구길 일 없이

행복하게 형님들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텐데요."

 

"뭐야. 걔네 만나러 가는 거였어?"

 

 

 

설영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진짜 왜 따라온 거야? 

그런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럼 내가 뭐 알고 따라왔겠나? 

궁금하니까 따라온 거지."

"돌아가십시오."

 

 

 

설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이 인간을 왜 상대하고 있나... 

하여간 이 사람은 저를 너무 쉽게 본다. 

문제는, 상대를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자하의 페이스에

휘말려 있다는 것일까. 지금처럼.

 

 

 

"내가 돌아가면 우리 가엾은 설영랑은

이 추운 날씨를 혼자 걸어가야 하잖아? 

그럴 순 없지. 내가 옆에서 말 걸면서

따뜻하게 만들어줄게."

"덥기까지 하니 돌아가셔도 될 듯합니다."

 

 

 

물론 저 사람 때문에 열불이 나 더운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도 더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얼마나 천재적이야. 안 그래?"

"말이라도 안 했으면."

"뭐라고?"

 

 

 

대답하기 싫은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목적지가

보였다. 설영은 모르는 척 앞에 있는 주막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설영랑,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나? 응?"

 

 

 

설영은 끈질긴 자하의 물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주막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나 설영을 맞이했다.

 

 

 

"설영아!"

 

"오는 길이 많이 춥지 않았니?"

 

설영은 미소로 그들을 응대했다.

 

 

 

"괜찮았습니다. 형님들은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우리는 잘 지냈지. 그런데..."

 

 

 

백송월의 눈길이 자하에게 향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상선이 왜 이곳에? 

라는 생각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금 당황스러워했지만

우선 예를 갖춰 인사했다.

 

 

 

"상선을 뵙습니다."

"그래."

 

 

 

백송월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자하가

설영을 흘겨봤다.

 

 

 

'봐. 보통 이런 게 정상이라니까.'

 

 

 

물론 설영은 상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디 그들의 관계가 보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나. 자하의 생각은 처음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자하와 설영은 절대로 보통부터

시작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첫 만남에는 서로를 오해하고 칼부림을 했고, 

자하의 사연과 엄청난 존재를 한 번에 알게 된 

‘그 사건’은 강렬하다 못해 뇌리에 콱 새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따지고 보자면 지금도

보통은 아니었다.

 

 

 

곧 설영은 스스로가 현재 취하는 태도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것을 알고 함께 행동하려면 응당

이 정도의 각오와 태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하가 들으면 기가 막혀 가슴을 칠 이야기였다. 

그때 자하가 뒤돌아 주막을 나서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설영랑도 데려다줬으니 이만 가봐야지."

 

 

 

자하의 말에 백언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차라도 마시고 가시지요."

 

 

 

어딜. 안 됩니다. 

끼어들지 마세요. 

그런 마음을 담아 자하를 째릿 노려보니

그가 설영을 힐끗 쳐다보곤 말했다.

 

 

 

"설영랑은 내가 동석하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이라."

"네?"

 

 

 

백송월의 눈길이 단번에 설영에게로 옮겨갔다. 

그들의 눈빛이 마치 형체없는 화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영에게 콕콕 박혔다. 

어이가 싹 사라졌다. 이렇게 복수하는 거야? 

송옥이 물었다.

 

 

 

"설영아, 상선 말씀이 사실이야?"

 

 

 

형님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자하에게

돌아가라 할 수 없었던 설영은 결국

그가 원하는 한 마디를 꺼냈다.

 

 

 

"...아닙니다."

 

 

 

했다. 

하고 말았어. 

이 말을 하고 나서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해댔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정말 평생을 가도 모를 거야. 

자길 골탕 먹인 건 그렇다 쳐도 형님들을 이용하다니. 

정말 치사하고 쪼잔하고 어이없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말이라도 안 했으면.

 

 

 

이 순간 제일 짜증 나는 건 상선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고, 두 번째로 짜증 나는 것은 승리감에

취해 살짝 올라간 저 미소다. 

정말 얄밉기 그지없는 상판대기가

아닐 수 없었다. 들을 말도 들었으니 이제 가겠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자하를 보며 물었다.

 

 

 

"가실겁니까?"

 

 

 

형님들이 보고 있어서 말을 많이 순화 시켜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얼른 가버리라는 뜻은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차갑고 냉소적인 말조차도

제대로 듣는 그라면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한

가실겁니까 정도는 찰떡같이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 사람이? 

설영은 순간 형님들이 있는 것도 다 까먹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가라고 외칠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운 인내력이었다.

 

 

 

"왜...."

 

"백언랑 말 기억해야지. 차 마시고 가라며?"

 

 

 

비겁하게 형님 말씀을 들고 오다니. 

하지만 그 말을 자신도 직접 들었기에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물론 자하가 볼 때만 불평불만

가득 어린 얼굴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자하가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있었지. 

워낙에 조용해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어떻게 저걸 까먹을 수가 있지? 이실직고하자면

옆에 있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다. 

답지 않게 말 한마디를 안 꺼내고

기척까지 죽이고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난 가볼게."

"벌써 가십니까?"

"차도 다 마셨으니 가야지. 설영랑은 잘 놀다 오고."

 

 

 

그러고선 정말로 가버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쌩. 

올 때 가라고 계속 말해도 안 가던 그 사람 맞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데... 

아니, 그건 아니다. 

저 사람은 죽어도 안 죽는 사람이니까. 

설영은 고개를 약간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뭐 이런 미신을 다 생각하고 있담. 

정말이지 끝까지 신경 쓰이게 만드는 사람이다. 

설영은 잠시 자하가 나간 문을 빤히 쳐다봤다.

 

 

 

"설영아, 왜 그래?"

 

 

 

효월의 부름에 설영은

다시 세 형님께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냥?"

 

"...조금 잡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넘어가 주셨다.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신 것 같아 여쭤보려는 순간, 

형님들이 먼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아무래도 형님들은 은근히 상선 눈치를 보고

계셨던 것 같다. 아까는 일상 이야기만 하시더니

지금은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꺼내놓으셨다. 

역시 오랜만에 만나니 할 말이 많아졌다.

 

 

 

"잘 지내고 있니? 힘든 일은 없었고? 

뭐라도 도움받고 싶다 하면 바로

찾아와야 하는 거 알지?"

"상선께선 잘해주셔? 

어디 다치거나 아픈 곳은?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 거지?"

 

 

 

다다다 몰아치는 질문들에 설영이

조금 당황하자 백언이 나서서 멈춰줬다.

 

 

 

"효월아, 송옥아. 설영이가 말할 틈도 줘야지."

 

 

 

하지만 그의 눈에도 대답이 몹시 듣고 싶다는

기운이 어려있었다. 설영은 하나하나 기억해둔

질문들을 모두 답했다.

 

 

 

"저는 잘 지내고 있고, 힘든 일은 별로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형님들께 먼저 말하겠습니다. 

상선께서는.... 네... 잘해..주십니다...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고, 밥도 제때 먹고 있습니다."

 

 

 

그제야 형님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무리 다 컸다지만 그들의 눈에 설영은

아직도 귀여운 막내일 뿐이었다. 그런 막내가

흉신이라 몰렸으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걱정될 수밖에. 형님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잔을 들어 올리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에 바로

동작이 굳었다.

 

 

 

"하기야, 상선께서 어련히 잘 챙겨주실까. 

우리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구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잘 챙겨준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장난치고 골탕 먹이고 놀리기나 하고. 

그것도 신경을 쓴다면 쓰는 거겠지만

챙겨준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설영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뭐, 가끔은 챙겨줄 때도 있긴 하지만 꽤 드문 일이지. 

아니면 그저 챙겨주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장난의 비중이

더 많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설영이 어찌 대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화제는 다른쪽으로 전환되었다. 

안심되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상선이 자신을 잘 챙겨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심란해졌다. 

그래도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아 얌전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설영이가 어렸을 때..."

 

 

 

갑자기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왔다. 

설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형님!"

"응?"

 

 

 

형님들의 표정은 정말로 귀여운 막내의 어린 날을

추억하는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이런 걸 막을 수 있을리가.... 

설영은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닙니다."

 

 

 

형님들의 눈에는 마냥 귀여워 보이는 것이라도

설영에게는 부끄러웠던 것이 꽤 있었다.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자하가 가서 다행이지. 

형님들이라면 상선께도 자신들의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내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자하까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으. 상상도 하기 싫다. 

아마 평생 갈 놀림거리가 됐겠지. 

끔찍하다. 그러던 중 형님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시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으음... 설영아, 잠깐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와 주겠니?"

 

"네."

 

 

 

이분들이 누구신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백호영도의 세 화랑이자

형님들이다. 무엇을 하자고 하셔도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윤리와 도의에 많이 어긋나지 않는 이상은.

 

 

 

설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송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을 이끌고 백운선원으로 갔다. 

선원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이

들 만큼 한산하고 적막했다. 지나다니는 낭도도

별로 없었다. 가끔 보이는 낭도들은 설영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려 재빨리 사라지기 일쑤였다. 

세 형님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점점 더 안쪽을

향하자 설영도 덩달아 심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누가 다치기라도 한 건가? 

많이 심각한 일이라서 그러시나? 불안감이 확 들었다.

 

 

 

"다 왔다."

 

 

 

백언이 말하자 송옥과 효월이 문을 열었다. 

백호영도의 모든 인원을 이곳에 전부 모아 둔 것인지

오는 동안 거의 보이지 않았던 낭도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이 놀란 표정으로 문 안으로 들어가니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사랑! 수고하셨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설영은 백의화랑이 아닌

백호영도의 사랑이었다. 

설영이 뻐끔거리다 효월을 붙들고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응? 그런 거 없었는데?"

 

 

 

효월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하지만 설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세 형님이 그리 심각한 얼굴을 하셨는데...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설마... 이것이 들킬까 얼굴을 굳히셨던 겁니까?"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평소 웃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던 설영이 보기에

정색하고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심각해 보인다

생각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그런 것이라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해질 수도.

 

 

 

"아.. 우리가 그랬나? 그랬을 수도 있겠다."

 

 

 

확실한 답변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거면 됐다.

 

 

 

"저기.. 사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수두룩하게 모여있는 낭도들이 설영의 상태를

걱정하며 설영에게로 다가왔다. 설영은

낭도들을 보며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설영의 물음에 낭도들이 밝게 대답했다.

 

 

 

"사랑이 많이 고생하셨으니까요."

"오늘은 뭐든 내려놓고 편히 쉬시는 거에요!"

송옥이 설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얘기했다.

 

"허락은 상선께 맡았으니 괜찮아! 

오늘은 다 같이 신나게 놀자!"

자하가 하루를 허락해줬다는 송옥의 말에

설영은 눈을 크게 떴다. 상선께서 직접? 

생각해보니 짚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까 같이 왔다 간 것이었나. 

놀다 오라는 소리가 정말로 놀다 오라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른 척한 게 약간 얄미웠지만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바쁜 상황 속에서 잠시간의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도와준 자체로도 감사하다. 바쁜 일상 속 숨돌리기는

달콤한 꿀과 같아서 웃음이 떠나가지 않는다.

 

"설영아, 뭐 하고 놀래? 우선 먹고 시작할까?"

 

그날 백운선원에는 평소보다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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