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그
< 수능, 모두 힘내자! >
수능 힘내세요.
아니, 이건 아니고.
응원할게요.
이것도 아닌데…….
"설영아, 뭐 해?"
"으악!"
의자가 덜컹, 하며 흔들렸다. 설영은 벌떡 일어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그곳에는
설영이 쓰던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자하가 있었다.
설영은 슬그머니 기어 나온 성질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자하를 샐쭉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전조도 없이 불쑥 말을 걸면 어떡해요?
인기척을 내야죠."
"나는 충분히 냈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뭘 하고 있기에 그렇게 열심인가 봤더니
아무것도 안 적혀 있네. 뭐 하고 있었어?"
"수능 응원 편지요. 곧 백언이 형 수능 보잖아요."
"아, 그래. 그렇지. 곧 수능이지."
"이제 와서 생각났다는 그 뉘앙스는 뭐예요?
선배도 그렇게 따르던 후배들인데,
응원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원이 뭐 별거 있나? 힘내라 한마디만 하면
그게 응원이고 덕담이지."
그 말에 설영은 '헛소리도 그만하면 재주다'라는
뜻의 눈빛을 보냈고, 자하는 거기에 '내가
틀린 말 했냐'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그런 눈빛 공방이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
설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죠. 저 편지 마저 써야 하니까."
"마저 쓰고 자시고 아직 아무것도 안 썼잖아.
그래서, 뭘 쓸 건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야죠."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네."
자하는 묘연한 웃음을 짓더니 설영에게 말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백언이라면 네가 힘.
한 글자만 써도 우리 막내가 이렇게 나를
생각해준다며 좋아할 애라니까?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좀 더 형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고요."
"고작 수능 응원 편지가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뭐 막간에 외울 거라도 적어주게?"
"그건 아니지만……."
"정 그러면 네가 평소에 형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적으면 되잖아.
그것만 써도 편지지 세 장은 나오겠다."
자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설영은 그런 자하를 흘겨보다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곧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자하는 그런 설영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설영이 편지를 거의 다 썼을 때 즈음
불쑥 말을 걸었다.
"그런데 설영아, 내가 오늘 널 왜 찾아왔는지 알아?"
"네? 그냥 한가해서 놀러 온 거 아니에요?"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자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수능 끝나고 주말에 학생회 애들 불러서
밥 사줄 건데, 너도 올 건가 물어보려고 했지."
"제가 거길 왜 가요? 3학년 선배들
사 주려고 한 거 아니에요?"
"아니, 학생회 전체인데."
이번엔 설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왜 저한테만 따로 물어보는데요?"
"다른 애들은 간다고 할 게 뻔하거든."
설영의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진짜 재수 없다. 도저히 그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설영은 자하와 학교를 같이
다닌 적도 없었다. 자하가 설영보다 세 살이
더 많았으므로 설영이 입학했을 때 자하는
이미 졸업한 뒤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이유는
워낙 백언, 송옥, 효월이 설영을 자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학생회 멤버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라
개인적으로 밖에서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백송월 셋은 자기네 막내도 데려와도
되겠냐며 물어왔고, 그렇게 해서 데려온 막내는
무척 귀엽다던 그들의 말과는 다르게
몹시 냉랭한 기색을 풍기는 중학생이었다.
자기 형들 이외에는 워낙 철벽을 쳐서 약간의
거리를 두던 다른 학생회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하는 설영을 꽤 귀여워하는 편이었다.
설영도 자하의 장난에는 치를 떨었지만
자하 자체는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의외로 그는
자신에게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는 인물에게
은근히 약했다.
하지만 설영은 자하 특유의 넘치는 자신감을
언제나 재수 없어 했다. 물론 본인에게 그 말을
직접 한 적은 없지만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표정에 가득 담아 그에게 보이는 것으로
할 말을 대신했다. 아니, 진짜 말로도 한 적 있던가.
어쨌든 설영은 이번엔 무시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언제 표정을
구겼냐는 듯 여상한 투로 말헀다.
"저도 갈 거예요. 안 간다고 해 봐야
형들이 절 끌고 갈걸요."
"뭐, 그야 그렇겠지."
"뭐야, 역시 무슨 대답 할지 알고 있었잖아요.
진짜 왜 온 거예요?"
"너랑 오랜만에 수다나 떨까 해서."
"결국 놀러 온 거잖아!"
설영은 분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다시 벌떡 일어나
자기 가방을 메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자하는 설영이 그렇게 나가다가 갑자기
뒤돌아 자기를 보며 톡 쏘아붙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해요, 수다 떨러 간다면서요?"
자하는 그 말을 듣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열심히 쓴 편지는 안 챙겨가도 돼?"
설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책상으로 다가가
편지를 조심히 챙기고는 자하를 쏘아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하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설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수능 당일 날.
백언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일어났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밴 그는 수능 날이라고
특별하게 부산스럽거나 서두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평소대로 준비하고,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는 그에게 백산은
큼지막한 도시락통을 건네며 말했다.
"평소대로만 해라."
"네, 아버지."
백언은 반듯하게 대답하며 도시락을 받았다.
백산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는 백언을 보며 백산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백언은 다행히도 자기 학교가 자신의
수능 시험장이 된 케이스였다.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차분했다.
교문 앞에 다다르니 역시나 엄청난 인파가 보였다.
수능장에 가방을 메고 바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아이를 배웅해 주는
부모님이나 수능 시계 등을 파는 사람들,
그리고 수험생을 응원하는 선생님과 후배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들을 시선으로 가볍게 스치며
지나가던 중 백언은 어떤 이들을 보고 멈춰 섰다.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백언이 형!"
송옥이 백언을 발견하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효월과 설영도 그를 따라 백언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백언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만날 건데 뭐하러 또 왔어."
"에이, 섭섭한 소리 하긴. 우리 백언이 형이 수능을
본다는데 당연히 교문에서 화이팅 정도는 외쳐줘야지."
"못 말려. 근데 들고 있는 것들은 다 뭐야?"
"이거? 당연히 형에게 줄 수능 간식이지.
쉬는 시간에 출출할 때마다 꺼내 먹어."
"그런 것치곤 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아무튼 고맙다. 잘 먹을게."
송옥과 효월이 간식이 한 아름 든 가방을
백언에게 건네주자 백언은 그것을 받으며,
친동생은 아니지만 언제나 막내라고 불러왔던
자신의 후배를 바라보았다. 설영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설영아, 혹시 뭐 할 말 있어?"
"네? 아, 저, 그게……."
설영이 말을 흐리자 송옥과 효월이
앞다투어 응원하는 말을 했다.
"설영아, 지금이 기회야.
빨리 형한테 그거 줘야지."
"그래. 그렇게 열심히 썼는데,
지금 안 주면 언제 주겠어."
설영은 그 말을 듣고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백언에게 내밀었다. 하늘색의 작은 봉투였다.
"저……. 편지예요. 수능 힘내시라고……."
그렇게 말하는 설영의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백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띠며
설영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니,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고맙다. 바로 읽어봐도 돼?"
"네? 형, 저, 시험장으로 빨리 들어가셔야죠."
"아, 들어가서 읽으라 그거구나?
알았어. 그럼 나중에 보자, 얘들아."
"그래. 형, 수능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그래, 화이팅."
백언은 아까보다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하고 있는 수험생들의 상태와는 별개로
교실 안은 조금 웅성거렸다.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더는 데 수다만큼 좋은 게 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 백언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에 서검, 화운, 무원이
교실 안으로 들어와 백언에게 다가갔다.
이미 백언이 오기 전에 다들 만난 모양이었다.
화운이 백언에게 말했다.
"수험표랑 필기구 같은 거 잘 확인했지?
뭐, 네가 그런 실수를 할 린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김서검은 지 컴싸 안 나오는 거
방금 알아서 컴싸만 한 박스 챙겨 온
무원이한테 빌렸다. 대박이지 않냐?"
"어제만 해도 잘 나왔었거든?
왜 하필 오늘 안 나와가지고 진짜."
"그래도 미리 알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무원이는 왜 한 박스나 챙겨 온 거야?"
"이런 사람이 있을까 봐."
"네가 감독 선생님이냐.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그나저나 진림이만 다른 시험장 돼서 어떡하냐.
걔 은근 그런 거 신경 쓰는데."
"자하 선배 그쪽 학교로 응원하러 갔다니까
그래도 기분 좀 낫지 않을까. 걔가 자하 선배를
유독 좋아하잖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서검이 넌 형이 같이 와 줬지?
서준 선배가 뭐라셔?"
"몰라. 수능 잘 보면 단소 연주 10년 경력의
형이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단소 궁극의 비기를 가르쳐준다나 뭐라나.
단소를 이 나이 되도록 불고 있다니,
그게 더 대단하지 않아?"
"명문 음대 학생한테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네. 너 수능 잘 봐야겠다."
"뭐래, 진짜!"
그렇게 시험의 긴장도 잊고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시험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둘러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그들은 나가기 전 한마디씩 했다.
"다들 시험 잘 봐!"
"그래. 너네도 잘 봐라."
"다들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너희도 시험 잘 봐!"
아이들이 떠난 후, 백언은 다시 한번
시계를 쳐다봤다. 국어 시험까지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공부했던 거 다시 훑어볼까.
백언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아직
설영의 편지를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잊어버릴 뻔했네."
수능 응원 편지라고 했으니 시험을 치기 전에
읽어야 했다. 백언은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펼쳤다.
이내 단정한 듯 흘려 쓴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백언이 형에게
안녕하세요.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 오다니.
저는 문자메시지조차 그렇게 길게 써 본 적이
없어서 편지의 형식도 내용도 엉망이겠지만,
처음이라 그런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형이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수능을
치게 되시다니,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처음 봤을 때의 형은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2살 차이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간이 고작 1년뿐이라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이렇게 형의 수능을
응원해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학년이 다른 게
더 좋다 싶기도 해요. 물론 1살 차이인
송옥이 형과 효월이 형도 다른 학년이긴 하지만.
응원하기 위해선 무얼 써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그런데 자하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평소에 생각하던 걸 적으라고.
자하 선배다운 조언이죠.
그 선배는 모두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니,
그 조언을 따라서 손해 볼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적어야 할지
몰라서 짧게 적어봤어요. 너무 웃진 마세요.
형, 형들은 줄곧 혼자였던 제게 다가와 주셨죠.
학년도 다르고 성격도 달라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도요. 처음엔 그저 같은 동아리
부원이라 그런다는 걸 알아서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보니까 형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고, 더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
그런 적이 처음이라 엄청 신기하면서도 무서웠어요.
형들은 졸업하고 나면 저에 대한 건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날 텐데,
그럼 제가 처음 느껴본 이 감정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하고요.
하지만 제 그런 걱정은 다 부질없는 게 되어버렸죠.
백언이 형은 졸업하고 나서도 저희를 계속
챙겨주셨고, 그건 송옥이 형이랑 효월이 형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형들을 만난 것도, 형들을 좋아하게 된 것도,
백산 선생님과도 계속 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요. 정말 고마워요. 백언이 형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거예요.
백언이 형, 수능 힘내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니
잘 될 거예요. 끝나고 나면, 나중에 회식 말고
우리들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화이팅.
형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후배 설영으로부터
"설영아……."
편지지를 들여다보던 백언은 어느새 가슴이
뭉클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우리 막내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써 주다니.
정말 다 컸네.
백언은 어느새 3년 전 처음 보았던 그날
홀로 서 있던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참 외로워 보이는 아이였지.
그 아이가 환한 웃음을 짓는 걸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함께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백언은 설영의 웃음을 그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설영이가 수능을 볼 때는
자신도 굉장히 힘을 내야 할 것 같다고.
물론 그 전에 내 시험부터 잘 봐야지.
백언은 편지를 고이 넣어두고 펜을 꺼냈다.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백언은 예비 종이 울릴 즈음 작게 중얼거렸다.
모두,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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